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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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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포 해전은 임진왜란 중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거둔 해전이다. 사천 해전 이후 당포에 정박해 있던 가메이 고레노리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 21척을 공격하여,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기함을 격파하고 일본군 지휘관을 사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하고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여, 임진왜란 초기 불리했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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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분쟁임진왜란
날짜1592년 7월 10일 (양력); 음력 1592년 6월 2일
장소통영 당포 앞바다
결과조선 수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교전국 2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조선이순신
원균
권준
김완
이언량
이영남
어영담
기효근
우치적
신호
정운
무의공 이순신
배흥립
이운룡
송희립
나대용
이기남
일본구루시마 미치유키
가메이 고레노리
병력 규모
조선 수군거북선(구선) 포함 26척
일본 수군전선 21척
피해 규모
조선 수군없음
일본 수군전선 21척 격침
관련 전투
캠페인제독 이 2차 캠페인
전투 목록사천
당포 (당포항)
당항포 I (당항포항)
율포 (율포항)

2. 배경

배경 섹션은 별도로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하위 섹션에서 당포 해전 직전의 상황을 상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배경 섹션에서는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도 됩니다.

2. 1. 사천 해전과 당포 해전 직전의 상황

사천 해전 다음 날, 이순신 함대는 사량도 앞바다에서 함대를 정비하였다. 6월 2일, 당포에 일본 함대가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은 즉시 함대를 이끌고 당포로 향했다.

3. 전투 경과

사천 해전에서 승리한 조선 수군은 사량도에서 밤을 보낸 후, 다음 날인 6월 2일 오전 8시에 척후선으로부터 당포(지금의 통영시 산양면 삼덕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당포 앞바다로 이동했다. 당포 선창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지휘하는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이 정박해 있었다.

3. 1. 조선 수군의 전술과 지휘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사천 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거북선을 선두에 내세워 일본 함대를 공격했다. 중위장 권준은 화살로 가메이 고레노리로 추정되는 일본군 장수를 명중시켰고, 바다에 떨어진 그를 첨사(僉使)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목을 베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은 지휘 체계가 무너지며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그러나 일본 측 기록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나타나 있어, 실제 생존 여부는 불분명하다.

3. 2. 일본군의 상황과 피해

당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 함대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지휘하는 대선 9척, 중선 및 소선 12척으로 총 21척 규모였다. 이들은 조선 수군의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권준이 가메이 고레노리로 추정되는 일본군 장수를 화살로 명중시켰고, 첨사(僉使)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그의 목을 베었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생환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는 기록이 있어 논란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준 금부채는 조선 수군에 노획되었다. 일본 군선 21척은 모두 격침되었고, 사살된 일본군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4. 전투의 의의와 영향

당포 해전은 사천 해전에 이어 조선 수군이 거둔 또 한 번의 큰 승리였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거북선을 앞세운 두 번째 전투였으며, 지휘관 가메이 고레노리가 탄 기함을 집중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비록 일본 측 기록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생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 수군은 가메이 고레노리로 추정되는 장수를 사살하고 금 부채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 군선 21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군이 사살되었다. 해상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된 일본군은 이후 전황에 큰 영향을 받았다.

4. 1. 전황에 미친 영향

당포 해전은 사천 해전에 이어 조선 수군이 거둔 또 한 번의 큰 승리였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일본군의 해상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거북선을 앞세운 두 번째 전투였으며, 지휘관 가메이 고레노리가 탄 기함을 집중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비록 일본 측 기록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생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 수군은 가메이 고레노리로 추정되는 장수를 사살하고 금 부채를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선 21척이 모두 격침되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본군이 사살되었다. 해상 작전에 큰 차질을 빚게 된 일본군은 이후 전황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4. 2. 이후 전투

사천 해전 이후 사량도에서 밤을 보낸 이순신 함대는 당포에서 가메이 고레노리가 이끄는 일본 함대를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권준이 가메이 고레노리로 추정되는 일본군 장수를 화살로 명중시켰고, 김완과 군관 진무성이 그의 목을 베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고레노리에게 준 금부채가 전리품으로 노획되었고, 일본군선 21척이 모두 격침되었다.

이후 이순신 함대는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 등에서 계속해서 승리하였다. 특히,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억기가 이끄는 전함 25척이 합류하여 조선 수군의 함대는 총 51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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